메이커스 노트
9,000곳의 학교, 만 명의 선생님이 쓰는 프로그램을 혼자 만든 개발자
토스 개발자 고태완은 왜 화려한 B2C 대신 학교 상담실이라는 좁은 시장을 택했나

친누나의 전화 한 통이었습니다. 상담 교사로 재직 중이던 누나가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쓰는 상담 프로그램이 너무 불편한데, 네가 이거 좀 만들어 볼 수 없겠냐고.
당시 고태완 대표님은 토스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상담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위클래스가 뭔지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나라에서 지정한 상담 프로그램, '위시스템'의 유지보수가 부실하고 사용성이 형편없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아보고 한번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게 사이드 프로젝트였습니다.
지금은 전국 700개 이상 학교, 잠재 고객 기준 만 명에 가까운 상담 선생님이 쓰는 프로그램을 혼자 만들고, 혼자 팔고, 혼자 CS를 하고 있습니다. B2C도 아니고, 화려한 플랫폼도 아닙니다. 학교 행정이라는, AI 시대에도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던 좁은 시장이었습니다.
위로그위클래스 상담일지, 위로그전국 700개 이상 학교가 사용하는 위클래스 상담일지 소프트웨어 '위로그'를 1인으로 만드는 대표, 전 토스 개발자https://weelog.me/
위클래스는 전국 9천 곳, 그런데 관리 도구는 캘린더와 한글 파일이었다
일정은 구글 캘린더에, 상담 내용은 한글 문서에, 보고는 나이스에 — 정보가 세 곳에 흩어져 있었다

위클래스는 초중고와 특수학교에 설치된 학교 상담실입니다. 가정 문제든 교우 관계든 아이들이 힘들 때 찾아가는 곳으로, 전국에 약 9,000곳이 있고 위센터까지 합치면 상담 관련 종사자가 만 명 규모라고 합니다. 제도 자체는 계속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이 상담을 관리하는 방식은 의외로 원시적이었습니다. 나라에서 지정한 위시스템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일정 관리 기능이 없어서, 선생님들은 구글 캘린더나 탁상 캘린더에 일정을 적고 상담 내용은 따로 한글 문서에 기록해야 했습니다. 정보가 파편화되어 있으니 확인하려면 일정과 일지를 일일이 합쳐서 봐야 하는 구조였던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위시스템은 후속 버전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서비스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업무 도구 없이 한글이나 엑셀로 알아서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상담 하나를 진행하면 상담일지, 월별 통계자료, 5년 보관용 문서, 그리고 나이스 제출용까지 같은 내용을 최소 세 번 반복해서 기록해야 했습니다. 위로그는 이 반복을 한 곳에서 끝내고, 문서는 자동 생성되게 만든 제품입니다.
www.wee.go.kr위(Wee) 프로젝트위(Wee) 프로젝트https://www.wee.go.kr/회사를 다니며 1년을 버텼지만, 경쟁사 등장이 시계를 앞당겼다
긍정적 피드백과 위협적인 경쟁, 두 신호가 동시에 왔을 때 퇴사를 결심했다
이런 문제를 확인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전업으로 뛰어든 건 아닙니다. 토스에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주말마다 조금씩 위로그 기능을 붙여나가셨습니다. 초기 MVP는 딱 두 가지 문제만 해결했습니다. 일정과 일지가 파편화된 것, 그리고 문서 작업이 중복되는 것. 이 최소 단위로 출시한 뒤 선생님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책상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현장의 요구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1년을 버티는 동안, 두 가지 계기가 거의 동시에 찾아왔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신호였습니다. 선생님들이 위로그 덕분에 시간을 많이 아꼈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했고, 심지어 유료화를 먼저 제안하는 분들까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위협적인 신호였습니다. 주말마다 개발하는 사이, 전업으로 뛰어든 경쟁사가 생긴 겁니다.
1년 동안 주말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전업으로 하는 경쟁사가 생겼어요.

퇴사 후 첫 결정은 신기능이 아니라 클라우드를 버리는 일이었다
민감한 상담 기록을 다루는 제품에서는 편의보다 안전이 먼저 증명돼야 했다

이렇게 등 떠밀리듯 퇴사를 결심했지만, 막상 전업으로 뛰어든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신기능 추가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창업가라면 퇴사 직후 화려한 기능부터 붙이고 싶어할 텐데, 대표님은 정반대로 움직이셨습니다. 기존 클라우드 기반 웹서비스를 로컬 파일 기반 데스크톱 프로그램으로 통째로 바꾸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학생 상담 내용은 극도로 민감한 정보이고, 앞서 위시스템도 클라우드 방식 때문에 문제 제기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위로그를 쓸지 말지 고민할 때 가장 많이 물었던 질문도 보안이 안전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큰 규모의 작업이었지만,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굉장히 큰 대규모 작업이었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2주 동안 매일같이 개발해서 2월 말에 데스크톱 프로그램으로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AI 기능은 상상이 아니라 상담실에서 걸려온 전화에서 나왔다
축어록 자동화부터 사례개념화까지, 전부 선생님이 먼저 말한 불편함이었다
이렇게 안전을 다진 뒤에야 AI 기능을 하나씩 얹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위로그의 AI 기능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전부 개발자가 상상해서 만든 게 아니라 현장에서 요청받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게 '축어록' 기능입니다. 원래 선생님들은 한 교시 상담을 녹음한 뒤, 상담만큼의 시간을 들여 다시 들으며 타이핑하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상담일지를 썼습니다. 상담 시간만큼의 노동이 한 번 더 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위로그는 이 과정을 음성 파일 하나로 끝냈습니다. 다만 방식이 까다로웠습니다. 민감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클라우드 AI가 아니라 로컬 AI로 구현해야 했고, 이건 기술적으로 훨씬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게 고객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빠른 상담일지 기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심시간에 학생이 갑자기 상담실에 들어오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을 어떤 선생님이 말씀해주셨고 그게 기능이 됐습니다. AI 분류 추천은 선생님들이 50개 가까운 분류 항목을 일일이 고르던 걸 줄여줬습니다. 사례개념화 기능은 여섯 번에서 열 번씩 이어지는 상담 기록을 한 번에 요약해주는 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전부 상담실 안에서 걸려온 요청이었습니다.
위로그에서는 AI를 활용해서 안전하게, 로컬 AI이기 때문에 외부로 데이터가 전혀 나가지 않습니다.
구독 대신 1년 선결제를 택한 건 스타트업 공식이 아니라 학교 예산 구조 때문이었다
매달 결제되는 구독은 학교 행정실 입장에서 오히려 불편한 방식이었다
제품이 이렇게 현장의 요청을 따라 완성돼가는 동안, 가격을 정하는 방식도 표준 SaaS 공식에서 벗어났습니다. SaaS라면 대개 월 구독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처음에 구독을 고려했다가 접으셨습니다.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고객의 예산 집행 방식이었습니다. 학교 예산을 쓰는 행정실 입장에서는 매달 결제가 일어나는 것보다 한 번에 결제되는 편이 훨씬 관리하기 편했던 겁니다. 그래서 1개월 무료 체험 뒤 6개월이나 1년 이용권을 판매하는 구조로 정착했습니다.
가격을 정할 때도 표준 SaaS 계산법과는 다른 기준이 작동했습니다. 위클래스 예산은 매년 줄고 있고, 그 한정된 돈으로 아이들 간식도 사고 상담실 물품도 사야 합니다. 너무 높은 가격을 매기면 아이들에게 가야 할 예산이 프로그램 쪽으로 쏠릴 수 있다는 게 대표님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저렴하게, 부담스러운 학교에는 단체 구매 할인이나 초대 이벤트로 부담을 더 줄여주는 장치까지 넣으셨습니다.
www.moe.go.kr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수 없습니다교육부에서 제공하는 Wee 프로젝트 및 Wee 클래스에 대한 홍보 자료입니다. Wee 클래스의 역할과 중요성을 교육부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https://www.moe.go.kr/boardCnts/view.do?boardID=293&boardSeq=93850&lev=0&searchType=S&statusYN=W&page=1&s=moe&m=020402&opType=N저는 이 대화를 들으면서 '좁은 시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위클래스는 화려한 시장이 아닙니다.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 일도 없고, 밸류에이션을 부풀릴 서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만 명이라는 확실한 사용자와, 매일 반복되는 명확한 페인포인트가 있었습니다. 저는 AI 시대의 1인 창업이라고 하면 자꾸 크고 화려한 B2C 플랫폼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팟캐스트를 준비하면서 게스트를 섭외할 때 은연중에 '얼마나 큰 시장인가'를 먼저 따졌던 것 같은데, 이 대화를 듣고 나니 그 기준 자체가 좀 게을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IT 기술의 혜택을 못 받고 있던 좁고 깊은 현장이야말로 개발자 한 명이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장의 크기보다 문제의 밀도가 더 중요한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컬 AI로의 전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더 어려운 길이 곧 더 안전한 길'이라는 문장을 곱씹게 됐습니다. 퇴사 직후 신기능이 아니라 인프라 전체를 갈아엎는 결정도, AI 기능을 클라우드가 아니라 굳이 로컬로 구현한 것도, 전부 기술적으로 더 힘든 선택이었습니다. 보통 창업 초기에는 속도가 전부라고 배우는데, 오히려 느리고 확실한 길을 택하신 걸 보면서 저는 이게 민감정보를 다루는 공공·교육 영역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장에서는 '얼마나 빠른가'보다 '얼마나 안전한가'가 곧 제품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게 모든 시장에 그대로 적용될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소비자가 편의만 보고 넘어가는 시장이라면 이런 선택은 오히려 손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이건 위로그가 다루는 정보의 성격이 만든 결론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퇴사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도 오래 남았습니다. 긍정적 피드백만으로도, 경쟁사 등장만으로도 퇴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신호가 겹쳤을 때 움직이셨습니다. 저는 이게 꽤 현실적인 판단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나가도 될까'를 고민하는데, 애정과 위협이 동시에 확인되는 시점이라는 게 하나의 참고선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팟캐스트를 사이드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본업처럼 시간을 쏟게 된 경험이 있어서, 이 이중 신호라는 기준이 유독 와닿았습니다. 물론 이건 대표님의 특정 사례일 뿐,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공식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혼자 판단해야 하는 1인 창업가에게는, 완벽한 확신보다 이런 이중 신호가 더 현실적인 나침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해볼 수 있는 것
이번 주에 한 사람에게 "매일 반복하는 일 중 제일 짜증나는 게 뭐냐"고 물어보세요. 위로그는 상담교사인 누나의 불평 한 마디에서 시작했습니다. 시장 조사가 아니라 아는 사람의 짜증에서 나왔다는 게 핵심입니다. 답을 요약하지 말고 그 사람이 쓴 단어 그대로 받아 적어보세요. 그 문장이 나중에 제품 소개 문구가 됩니다.
같은 내용을 두 번 이상 옮겨 적고 있는 자리를 하나 찾아보세요. 선생님들은 일정은 캘린더에, 기록은 한글 문서에, 보고는 나이스에 넣고 있었습니다. AI가 아니라 이어붙이는 일이 먼저 없어져야 했던 겁니다.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사람이 손으로 옮기고 있는 지점이 곧 출발점입니다.
내 제품이 다루는 데이터의 민감도를 한 줄로 적어보세요. 퇴사 후 첫 작업은 기능을 늘리는 게 아니라 클라우드를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편의보다 안전이 먼저 증명돼야 하는 도메인이 있고, 그게 곧 진입장벽이 됩니다. 사용자가 "이거 어디에 저장되나요"라고 물었을 때 한 문장으로 답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지난달 받은 문의를 펼쳐놓고 같은 말이 몇 번 나왔는지 세어보세요. 위로그의 AI 기능은 상상해서 만든 게 아니라 상담실에서 걸려온 전화에서 나왔습니다. 도메인을 모를수록 상상으로 기능을 설계하면 안 됩니다. 반복된 문장 하나가 다음에 만들 것입니다.
고객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 확인하고 가격 단위를 거기 맞춰보세요. 구독 대신 연 단위 선결제를 택한 건 스타트업 공식이 아니라 학교 행정실의 결제 관행 때문이었습니다. 개인 카드인지 법인 예산인지 연 단위 집행인지에 따라 팔리는 단위가 달라집니다.
이번 달에 없앨 반복 작업 하나를 지금 정해두세요. 혼자 만들고, 팔고, CS까지 합니다. 1인 메이커의 한계는 실력이 아니라 시간이고, 늘리는 것보다 없애는 것이 먼저입니다. 가장 많이 반복한 수작업 하나를 골라 자동화할지 그만둘지 정해보세요.
스스로 조언할 입장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기신 말은 하나였습니다. 고객이 정말 전부라는 것. 한 분 한 분의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입소문이 난다는 것. 토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위로그를 운영하며 다시 확인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교 상담실이라는, 저도 이번에 처음 들어본 시장에서 혼자 개발하고 팔고 CS까지 하는 창업가의 1년 반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전체 대화를 직접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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